자본시장의 불공정성에 대하여
자본시장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불공정한 시장을 경험한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지금처럼 밝은 세상에서 어떻게 이처럼 사악한 일이 벌어지는지 경악을 금치 못하는 입장이 된다. 과연 이런 불공정한 일이 일어나도 괜찮은 것인가?
사마천은 불후의 저서 ‘사기’를 저술하였다. 그의 저술을 읽어보면 과연 이것이 한 사람이 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의 대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첫머리에서 사마천은 백이숙제의 고사를 기술하면서 하늘의 도가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은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잘못이 없는데도 궁형을 받아 치욕의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을 분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간 수많은 삶에 비교해 보자면 사마천은 결코 불우한 생이 아니었다.
당시에 사관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글을 익히고 자신도 사관이 되어 유복한 생활을 한 입장이 아니던가?
그렇지 못한 신분으로 태어나 가축처럼 살다가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이 훨씬 더 많은 세상에서 바라보면 사마천은 행운아였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보는 그의 시야가 자신을 억울하다고 생각하게 만들 뿐이다.
대개 좋지 않은 결과는 자신의 탓이며 복된 결과는 자신이 처한 환경 덕분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았더라면 위험에 처하지는 않았으리라.
사마천이 물었던 하늘의 도란 과연 무엇인가? 아마 세상에 정의가 있는지를 묻는 것이리라.
현명한 자는 세상이 불공정하다는 것을 일찍 깨닫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사람이 고시공부를 통하여 젊은 나이에 판사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판례를 외우고 많은 재판을 다루면서 판결을 하게 된다. 그런 자가 과연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것일까?
그 사람은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위해서 판사가 된 것이 아니다. 오직 일신의 영달과 부귀한 삶을 위해 어려운 시험을 치러내고 영광스런 자리에 오른 사람일 뿐이다. 눈앞의 재판에서는 판례에 따를 뿐이고 자신에게 금전적인 이익이나 도움이 되는 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할 뿐이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이익이나 국민의 권익을 위해서 국회의원이 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빛나는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전체의 이익이 있더라도 자신이 빛나지 않고 정적이 빛난다면 무슨 소용인가? 오직 자신과 무리의 이익을 쫓을 뿐이다.
정의로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는 이상향에 가깝다. 이익으로 소구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투자의 세계에서 정의를 찾는 것은 어리석음에 다름 아니다.